이번 설날에 있었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식사 준비를 하느라 주방에서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나는 부침개를 잘라서 내놓기 위해 한 손에 젓가락을 들고 가위를 찾았다. 그때 엄마가 왼손으로 쓰는 가위 같다며 가위 하나를 가져다줬다. 보통 가위는 왼손에 집게를 쥐고, 오른손으로 자를 수 있게 나온다. 오른손으로 가위를 쥐면 아귀가 맞지 않는다. 집게가 없으면 도통 혼자서 가위질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늘 2인 1조로 한 사람은 오른손 젓가락질로 부침개를 잡고, 한 사람은 오른손 가위질로 부침개를 자르곤 했다. 하지만 이 가위가 있으면 혼자서 왼손에 가위를 쥐고, 오른손에 젓가락을 쥐고 가위질을 할 수 있었다.
부침개를 자르는데 가위가 서걱 서걱 잘도 잘렸다. 할아버지는 방에 앉아서 가위가 잘 드니 조심하라고 소리치셨다. 부침개를 자르면서 '할아부지 되게 좋은 가위 사셨네.' 하고는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 넣었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싱크대 앞에 섰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면 그릇에 남은 이물질이 없는지 확인하기가 어렵고 내 손이 내 손 같지 않아 답답해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버릇이 있다. 물 온도를 확인하고, 밥풀이 눌어붙은 그릇을 먼저 물에 한 번 담가서 불리고, 세제를 풀어서 문지르고, 헹궜다. 설거지가 다 끝나갈 때쯤 아래에 깔려있던 가위가 나왔다. '아까 그 가위네. 부침개를 잘랐으니 기름기가 없는지 확인해 보자.' 하고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피가 났다. 살다 살다 칼에 베어본 적은 있어도 가위에 베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정말 잘 갈린 칼이나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다치지 웬만한 칼도 사람 손을 이렇게 쉽게 베지는 않는다. 가위가 잘 든다는 말이 이 정도로 잘 든다는 말일 줄이야. 나는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는 손을 부여잡고는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돌아와 소파에 앉자 일한 티를 낸다며 할아버지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소독약과 밴드를 찾으려고 일어나는 할아버지에게 이 정도 상처는 끄떡없다며 한사코 말렸다.
집에 돌아와 여느때처럼 점심 식사 준비를 하던 오늘, 집에 있는 가위를 보니 문득 엄마가 했던 자랑이 떠올랐다. 카카오메이커스에서 특별히 주문한 거라며 가위가 너무 잘 든다고 신나 했다. 그놈의 카카오메이커스. 엄마는 카카오메이커스에서 몇 번 물건을 주문해 보더니 MD가 미리 물건을 잘 골라서 실패하는 법이 없다며 매일같이 들어가 새로운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특별히 주문한 새 가위는 나보다도 인생 선배처럼 보이는 낡은 가위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잘 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집에 있던 가위보다는 한참 못 미쳤다.
대체 할아버지는 어디서 그런 가위를 구했을까? 분명 나는 검색만 하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가위, 세상에서 제일 비싼 가위를 손 쉽게 손에 얻을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는데. 분명 같은 지구지만 할아버지에게는 없는 세상. 나에게만 열린 인터넷 세상. 할아버지는 아마도 온라인 쇼핑이라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거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기는커녕 TV 홈쇼핑 전화 주문조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잘 드는 가위를 구해서 쓴다. 칼이 두 짝 달린 것 같이 서슬퍼런 날을 가진 할아버지의 가위. 나는 아마 평생 그런 가위를 고르지 못할 거다. 내가 아무리 검색창을 헤매고 다니며 사진을 백날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해서 할아버지의 80년 노하우를 깨칠 방법을 없을 거다. 이렇게 빠른 인터넷도 할아버지의 지혜를 쫓아가기는 한참 멀었다.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서 그 가위를 구했을까? 하루 세 번 식사 준비를 하면서 가위를 손에 쥘 때 마다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물어보지 못했다. 당신이 아무리 어렵게 구한 물건이어도 손주가 좋다고 하면 덥석 가져가라고 손에 쥐어줄게 뻔해서.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 물어보지 못할 것 같다. 나중에 가위의 날이 무뎌지고 무뎌져서 더 이상 남은 기름기를 확인하러 손을 가져다 댔을 때도 손이 베지 않는 때가 오면 그때는 물어봐야지. 대체 어디서 그렇게 좋은 가위를 사셨냐고. 줄곧 궁금했다고. 때가 묻어 손녀에게 줄 수 없는 물건이라고 여기실 때를 기다려 그때 물어봐야지. 그럼 손녀에게 인정받는 게 기분 좋아 신나게 알려주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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