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일이 정해지고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있지만 먼저 꼭 만나고 가야 할 소중한 사람들과의 약속부터 잡았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빠르게 출국일이 잡혀서 이번주는 부산에 가고, 다음 주는 서울에 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하루에도 몇 개씩의 일을 해치우고 있다.
[D-23] 3월 15일(금)
✅ 오늘 한 일 : 건강검진
오전 8시에 병원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도착해 건강검진을 받았다. 7시 55분쯤 병원 문을 밀면서 과연 문이 열릴까? 하고 살짝 긴장했는데 웬걸. 병원 의자에 빼곡하게 앉아있는 어르신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됐다. 이렇게 이른 시간대에 병원에 가는 젊은이는 나밖에 없나보다. 8시도 안 됐는데 건강검진을 위해서 왔다고 하니 바로 검진실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건강검진 담당자가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검사는 가능하다고 해서 기본적인 검사들을 받았다. 피검사, 소변검사, 유방 엑스레이 촬영, 몸무게, 키를 재고 끝났다.
[D-22] 3월 16일(토)
✅ 오늘 한 일 : 비행기 티켓 예매, 스카이 라이너 예매
토요일에는 라라, 성겅, 임찌를 만났다. 예전 직장 동료들인데 2018년에 만나 벌써 만으로 6년이 된 사이다. 퇴사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시간을 내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만난다. 예전에는 매년 제주도 여행도 다녔는데 이번에 라라가 결혼을 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어 한동안 만나기 힘들 것 같아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볼 겸 만났다. 14킬로가 늘었다는데 거짓말처럼 배만 나오고 똑같았다. 신체적인 변화가 있어서 힘들 텐데도 서면에 나와서 같이 밥 먹고, 카페 가고, 사진도 찍고, 보드게임도 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호르몬 변화도 크게 있을 것 같아 감정적인 변화는 없는지 물어봤는데 유별나게 먹고 싶은 것도 딱히 없고, 감정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지도 않고 평소랑 같다며 덤덤히 웃었다.
참 대단하다. 정말 좋은 엄마가 될 것 같다. 나는 엄마아빠를 정말 좋아한다. 엄마 아빠를 만나는 데 내 운을 다 쓴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나의 엄마와 아빠는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라라도 왠지 그런 좋은 엄마가 되어줄 것 같다. 아이한테는 많은 걸 해주는 게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아이를 위해 떠는 유난은 아주 높은 확률로 아이를 힘들게 만든다. 아이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붓고, 아이가 따라오지 못하면 실망하고 소리치고 다그치는 부모보다는 뭐든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겪어보도록 내버려 두고 좋은 일에도 슬픈 일에도, 성공에도 실패에도 덤덤하게 허허 웃을 줄 아는 사람이 좋은 부모 같다. 부모가 되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우리 넷 다 참 다른 사람인데, 예전에는 그 다름이 이상하게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다름이 때로는 대단하게 때로는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배울 점도 많고, 인정하게 되는 부분들이 생긴다.
아무튼, 요즘은 늘 새벽에 일찍 깨는데 이 날도 여전히 일찍 깼다. 7시 전에 눈을 떠서 나갈 준비를 하고, 연근 브로콜리 무침과 바나나, 두유로 아침을 먹었다. 7시 45분에 집을 나서 55분에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8시 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서 10시에 안과에 갔다. 인공눈물을 받으러 간 거였는데 아직 지난 검진을 받은 지 3개월이 지나 인공눈물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아주 제대로 바보비용을 썼다. 인공눈물은 못 받고, 여전히 시력이 잘 유지되고 있고 건조한 것 외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만 확인받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11시 반에 태국요리가 먹고 싶다는 임산부의 요청에 아임타이라는 태국요릿집에 갔다. 문 열기 10분 전에 도착해서 잠시 줄을 서있다. 1등으로 입장했다. 앉아서 기다리니 성겅, 라라, 임찌 순으로 도착했다. 푸팟퐁커리와 족발덮밥, 팟씨유, 쌀국수를 먹었다. 푸팟퐁커리의 게를 찹쌀반죽으로 튀겨서 아주 맛있었다. 족발덮밥, 팟씨유, 쌀국수도 모두 괜찮았다.
점심을 먹고는 반드시 인생네컷을 남겨야 한다는 나의 요구에 함께 사진을 찍으러 갔다. 6년이나 만났는데 같이 찍은 인생네컷이 하나도 없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도먼트라는 카페로 옮겼다. 안에 귀여운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손님이 오면 밖으로 나와서 한 바퀴 순회공연을 하곤 했다. 귀엽긴 하지만 방심하고 있을 때 즈음 엄청나게 큰 소리로 한 번씩 컹! 하고 짖어서 사람 심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지나니 웨이팅이 생겼다. 사실 공간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웨이팅을 할 정도는 아닌데 웨이팅이 생겨서 놀랐다.
주문을 할 때 웨이팅이 있을 경우 이용시간에 제한이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고, 자꾸만 문 밖에 웨이팅 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며 웨이팅의 압박에 못 이겨 나갔다. 오랜만에 보드게임을 하러 보드게임 카페에 갔다. 정말 살면서 보드게임 카페에 딱 2번 가봤는데 전부 다 이 조합으로 갔다.ㅋㅋㅋㅋㅋ 정말 이 사람들이 아니면 내가 보드게임 카페에 제 발로 가는 일이 평생 있을까?
보드게임 카페에 가서 거의 2시간 동안 게임을 했다. 3개 정도 게임을 했는데 라스베가스를 가장 재밌게 했다. 다들 나가는 길에 보드게임 패키지 사진을 찍어갔다. 임찌가 라스베가스를 하면서 아득바득 내기를 하자고 해 꼴찌가 시간 요금을 결제하는 걸로 했는데 성겅이 꼴찌가 됐다. 임찌가 3등, 라라가 2등, 내가 1등이었다. 게임을 전혀 잘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에 한 보드게임은 다 좋은 성적을 거두고 끝났다.
5시 반쯤 나서서 6시에는 늘보와 만났다. 타코리타라는 멕시코 요리 식당에 갔다. 쉬림프 치미창가와 BBQ 치킨 퀘사디아를 먹었다. 너무 많아서 다 먹지는 못하고, 한 조각 남은 퀘사디아를 포장했다.
늘보에게 출국일이 정해졌다고 알렸는데 얼마 전에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 '일본'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군침을 흘리는 상태였다.(?) 3박 4일 동안 3-4키로가 늘었다고 정말 맛있는 게 그렇게 많았다고 강조했다. 꼭 일본에 있는 동안 놀러 오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나를 보러 오기보다는 클라이밍을 하러 올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인생네컷을 찍었다. 다들 사진으로 많이 남겨둬야 한다. 일본에 가서 정말로 들여다볼 것 같다. 사진은 꼭 가져가야지. 그리고 금방 집으로 들어갔다. 가서 무무랑 후후랑도 이야기를 나누며 놀았다. "이모 이거 봐요" X100이었지만. 당연히 어른 체력으로 아이들을 당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금방 쑥쑥 커서 내가 가면 방에서 안 나오는 나이가 되겠지? 1년 뒤에 오면 또 얼마나 커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한 마디라도 많이 해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귀여워 한 유일한 아이들.
저녁에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이미 집을 구했으니 진짜로 가는 게 맞는데도 왜인지 비행기를 끊으면 돌이킬 수 없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계속 미뤄왔다. 하지만 이번주 주말에 비행기 표를 끊겠다고 결심한 이상 끊어야 했다. 비행기를 끊어야 해외체류신고 등 해치울 수 있는 절차들이 있어서 끊어버렸다. 무려 24만 원이나 들었다. 말도 안 돼. 그리고 비행기를 끊은 김에 스카이라이너도 함께 끊었다. 스카이라이너도 끊으면 환불이 안되기 때문에 눈 딱 감고 끊어버렸다. 이렇게 오늘은 워홀을 위한 두 보 전진!
[D-21] 3월 17일(일)
✅ 오늘 한 일 : 유쵸 은행 예약, 해외체류신고
오늘도 6시 50분쯤 눈을 떴다. 언제쯤 8시까지 늘어지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아니 직장인이 주말에 8시에 일어나는 게 늘어지게 자는 게 맞기는 한가? 6시 50분쯤 일어나서 밀리의 서재로 책을 조금 읽다가 또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책 읽기를 반복하다 보니 9시 반이 됐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거실에서 무무와 후후와 놀아주며 시간을 보냈다.
늘보가 바지런히 외출준비 하는 걸 구경하면서 무무가 만든 종이 로봇을 구경하고, 후후의 인형 친구들이랑 놀았다. 무무가 만든 종이 로봇은 정말 대단했다. 10단 분리도 되고, 어깨 위에 장식을 옮겨 붙일 수도 있고, 다 두 발로 섰다. 무무는 정말로 천재 같은 구석이 있다. 정말 신기해 사진 찍어도 되냐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와서 세 개의 종이 로봇을 세워줬다. 그리고 후후는 마냥 귀엽다. 언제까지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팽긴 이모~ 하면서 나를 불러줄까?
오늘은 늘보가 클래스를 끊어둔 게 있어 함께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늘보가 나가는 시간에 함께 나서서 나는 헌혈을 했다. 공복으로 헌혈을 할 수 없어 아침으로 마셰리27에서 빵을 사 먹었다. 플랑 하나를 먹고 텀블러에 든 물 한 병을 비우고 헌혈을 했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 20대 초반 내내 헤모글로빈 수치가 9~10까지 떨어져 몇 년 동안 헌혈을 못했다. 늘 그게 신경이 쓰여 헌혈하면서 헤모글로빈 수치를 잴 때마다 선생님에게 수치가 몇이냐고 물어본다. 선생님이 수치가 좋네요~ 하시기에 몇 나왔나요? 물어보니 14.5가 나왔다고 했다. 정상 범위가 12.5~15.5이니 정말 좋은 수치다. 수치가 9까지 떨어졌던 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수준이 아닐 수가 없다. 9까지 떨어졌을 때는 본인이 쓸 피도 없다며 거절당했고, 10일 때는 정 원하면 혈장만 가능하다고 혈장만 했는데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전혈 헌혈을 했다. 이걸로 11번째 헌혈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디저트가게인 아니버에 가서 사랑에 빠진 딸기 미니파이를 구매했다. 이 집의 미니 파이에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지 냉동실에 넣어도 바삭함이 유지된다. 냉동실에 넣어서 얼려 먹어야 제맛인데 나는 정말 한 입 먹고 사랑에 빠져서 결국 다 먹어버렸다.
사상터미널에 12시 40분쯤 도착해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타서 눈을 좀 붙이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워홀 관련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해 봤다. 검색을 할 때마다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난다. 워홀 준비는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굳이 미리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도 물론 있지만 검색해 보면 미래의 나를 위해서 미리 해놓으면 좋을 일들 뿐이다.
버스에 앉아서 가다실 9 맞는 법과 워홀 3종 세트에 대해서 검색해 봤다. 그때 가서 알아봐도 되지만 미리 어떻게 하면 될지 뭐가 필요한지 구청 오픈 시간은 몇 시 인지 등을 미리 알아놓으면 당일에 허둥댈 일이 줄어드니 좋지 않을까? 지금도 바쁜데 그때의 나는 얼마나 바쁘겠냐고. 이사해서 짐 정리하랴, 입국하자마자 회사 일하랴 정신이 없을게 분명하다. 지금 알아봐 놓은 정보들은 분명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다. 정보를 검색할 시간에 바닥 닦고, 빨래 돌리고, 짐을 풀 시간이 생길 거다.
그래서 버스에 앉아 유쵸 은행 예약을 진행했다. 워홀 3종 세트라고 불리는 주소 등록, 휴대폰 개통, 통장 개설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유쵸 은행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구좌 계설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본에 갔으니 일본 법을 따라야 한다. 주소 등록과 휴대폰 개통이 되어 있어야 통장 개설이 가능한데, 당일에 방문이 안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워홀러들은 이 업무들을 한 번에 해결하지 못한다. 첫 날에는 은행 예약만 해두고, 일주일 정도 뒤에 방문해 구좌를 계설한다. 하지만 나는 직장인. 평일에 시간을 또 내서 은행에 방문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무려 한 달 전에 미리 온라인으로 유쵸 은행 예약을 진행했다. 벌써 3타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도 제일 늦은 시간이 오후 2시라 그 시간으로 예약했다. 2시까지 구약소에서 주소등록을 하고 라쿠텐에서 휴대폰 개통까지 끝낼 수 있을까? 8시 반에 구약소 오픈런을 할거지만 과연 계획대로 흘러갈지 두렵다. 하루종일 쫄쫄 굶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 안에 끝내고 싶다. 2시에 유쵸 은행에서 통장 개설까지 끝내고 끝내주는 식사를 하고 싶다.
집에 도착해서는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해외체류신고를 했다. 비행기 티켓과 여권 사본, 비자 사본이 각각 이미지 파일로만 있으면 온라인으로 쉽게 신청이 가능했다. 세대주인 아빠의 주민등록번호도 필요했다. 마당에 있는 아빠한테 가서 주민번호를 불러보라고 하니 술술 불러줘서 이유도 안 물어보고 그렇게 주민등록번호를 술술 불어줘도 되냐며 낄낄대고 들어왔다. 신청을 하자 금방 세대주인 아빠에게도 연락이 갔다. 처리는 평일 기준 3-4시간이면 된다고 하니 내일이면 해외체류신고가 완료될 것 같다.
저녁으로 육회에 흑돼지 목살을 구워 먹었다. 미나리에 상추 깻잎을 쌈 싸고 김치랑 파김치도 구워 신나게 먹었다. 너무 피곤해서 어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자고 싶어서 일찍 저녁을 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어버렸다.
저녁을 먹고 나 혼자만 레벨업을 보면서 군것질까지 했다. 아주 좋은 생활습관이 아닐 수가 없네... 나혼자만 레벨업을 보는데 존경어와 겸양어가 많이 나와서 계속 따라 하면서 시청했다. 알아듣는 건 정말 100%에 가깝게 되는데 막상 말하라고 하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고민하고 써서 보낼 수 있는 메일에서는 문제가 없는데 부동산을 직접 만나면 갑자기 예의 없는 사람이 될까 봐 걱정된다. 왜 메일이랑 다른 사람이 왔지? 싶으면 어떡하지.
내일은 부동산에 보증금 입금 완료 사실을 알리고, 다음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나머지 금액은 만나서 현금으로 전달드리겠다고도 메일로 전해야 한다. 비행기도 끊었으니 이제 약속 시간도 확실히 잡을 수 있다. 건강검진은 받았지만 자궁경부암 검사는 따로 받아야 해서 산부인과 예약도 해야 한다. 오늘은 오늘의 할 일을 했으니 내일은 내일의 할 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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